『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는 고등학생 선우혁이 십여 년 전 세상을 떠난 형이 다니던 학교에 입학해 벌어지는 일들을 그리며 자신과 타인에 대한 다면적인 이해를 넓혀 가는 성장의 과정을 깊이 있게 조망한다. 형의 메타버스 비밀 공간에서 마주친 ‘곰솔’이라는 인물의 정체가 궁금증을 자아내며, 설레고 가슴 아픈 첫사랑 이야기가 마음을 울린다.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생한 학교의 모습과 자연스럽게 묘사된 메타버스 세계 역시 풍성한 재미를 더한다. 무엇보다 이희영 작가는 선우혁과 형 선우진, 그리고 곰솔의 이야기를 통해 생명력이 가득한 여름이라 할 성장의 한 시기를 지나는 청소년의 마음에 서늘하게 깃든 겨울 그늘 같은 아픔을 짚으며, ‘여름의 귤’처럼 이르게 찾아온 설렘과 이별의 경험을 간직한 이들에게 새콤하고 달콤한 위로를 건넨다. 눈 깜짝할 사이 환상적인 풍경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는 작가 이희영의 세계로 새롭게 빠져 볼 시간이다.
시간이 멈춘 방문 너머에 잠든 비밀
세상을 떠난 형의 ‘진짜’ 세계를 발견했다
“형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어?”
누군가에게는 설렘과 긴장으로 가득할 고등학교 입학식이지만, 선우혁은 부모님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십이 년 전 세상을 떠난 형과 쌍둥이처럼 꼭 닮은 모습으로 같은 학교의 교복을 입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형에 대한 기억이 적은 만큼 슬픔이나 그리움보다 호기심이 커져 가던 선우혁은 학교 복도와 교실 곳곳에서 자연스레 같은 곳을 걸었을 형에 대해 생각한다. “형은 어떤 학생이었을까?”(61면)
그러던 중 우연히 예전에 유행했다는 메타버스 게임 ‘가우디’를 알게 된 선우혁은 형의 계정이 남아 있음을 발견하고 형의 아바타 JIN으로 가우디에 입장한다. 게임 속 가상 현실과 형이 만든 정원이 멀쩡히 유지되고 있는 사실에 놀라던 찰나, 그곳에서 주인 없는 정원을 지키고 있던 ‘곰솔’과 마주친다.
“오랜만이야?”(66면) 마치 몇 달 만에 만난 친구에게 인사를 건네듯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거는 곰솔을 보고 당황한 선우혁은 급히 접속을 종료하고 자리를 벗어나는데……. 형을 사칭했다는 죄책감이 드는 한편으로 형의 정원, 그리고 곰솔에 대한 궁금증은 점점 더 커져 간다. 아무도 없는 형의 가상 세계를 지키고 있던 곰솔은 누구일까? 형과는 대체 어떤 관계일까?
닿을 수 없는 이에게 보내는 편지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정원에서 만나
학교와 집에서 형의 흔적을 찾아가는 선우혁의 시선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가운데, 이름 없는 누군가의 ‘너’를 향한 편지가 교차하며 소설은 한층 풍성해진다. 처음 학교에서 ‘너’의 목소리를 들은 날부터 함께했던 조별 활동, 그리고 이상한 소문이 퍼진 후 더욱 가까워지며 가우디에 둘만의 공간을 만들기까지. 긴 시간을 건너 전해지는 편지에는 첫사랑의 설렘과 그리움이 가득 담겨 있다.
남들에게 쉽게 드러내지 못하고 소문에 가려져 있던 진심을 비밀 공간에서만큼은 진솔하게 터놓을 수 있었음이 편지를 통해 짐작된다. 서로를 알아 가는 과정은 “타인이 아닌 낯선 스스로를 만나는 시간”(121면)이기도 하다. 이처럼 한없이 투명한 마음을 키워 갔던 이들의 시간을 엿보게 하는 편지는 작품에 특별한 아름다움을 더하며 선우혁이 파고드는 형의 비밀과 점점 겹치고, 형의 정원을 둘러싼 비밀을 더욱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거 알아? 사실 여름귤도 되게 맛있다.”
비밀을 간직한 채 자라나는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
형이 남긴 정원의 비밀을 좇던 선우혁은 결국 부모님도, 형의 오랜 친구와 선생님도 가우디와 곰솔의 존재를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벽에 부딪힌 듯 답답한 상황에서 선우혁은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형은 어떤 사람이었어?”(153면) 그리고 돌아오는 답은 모두 다르다. 형은 “무던한 성격”의 친구였고, “조용하고 책임감 강한 학생”이었으며, “애교 많은 수다쟁이 아들”(203면)이었다. 이를 통해 선우혁은 깨닫는다. 마치 부조 조각처럼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한 상대만 알고 있다”(204면)는 사실을. 친구 도운의 말은 그런 점에서 형의 비밀을 더 넓은 각도에서 바라보게 한다.
“비밀은 그림자 같은 게 아닐까? 세상에 그림자가 없는 사람은 없잖아. (…) 그림자라고 해서 다 나쁜 것도 아니야. 어렸을 때 했던 그림자놀이를 떠올려 봐. 세상에 모든 비밀이 나쁘기만 하겠냐?” ―본문 166면
스스로와 타인에 대한 이해를 넓혀 가는 청소년기, 친구들 앞에서의 모습과 가족 사이에서의 모습,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의 모습은 다를 수밖에 없다. 저마다 다른 얼굴이기에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이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는 세밀한 묘사를 통해 한 사람이 보여 주는 다양한 모습을 그 자체로 존중하며 받아들이게 한다. 사랑의 설렘과 아픔, 그리움과 애도 등 다채로운 빛깔로 성장하는 이의 마음을 환상적인 홀로그램처럼 아름답게 조명하는 값진 소설이다.
There are no expecta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