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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sing Above the Scars of History scrap download

역사의 상흔을 넘어

스웨덴 한림원이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강(54)을 선정하면서 언급한 작품은 모두 9종(단행본 기준, 단편으로 ‘에우로파’도 언급됐다)이다. “역사적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인간 삶의 유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하고 시적인 산문”이 한강 작품에 대한 총평이다. 틀린 평가일 수 없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다. 작중 ‘사람’이 눈사람이 되고(단편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2015) 식물이 되고(단편 ‘내 여자의 열매’·1997, 장편 <채식주의자>·2007), 죽은 이가 말하고(<소년이 온다>·2014), 죄다 잊혀진 이들과 새삼 작별하지 못한다(<작별하지 않는다>·2021)니? 이처럼 불가역의 물리를 가역적 사태로 뒤집는 것은 단순한 ‘시적 산문’이 아니라, 전반의 ‘시적 서사’요, ‘시린 겨울’에서 벼려낸 ‘시어’라 해야겠다. 시적 서사와 그 시어로 한강은 육신과 영혼, 생과 사의 경계를 미학적으로 탐찰하고 있다.


한강은 또한 개인과 정치, 즉 개인과 역사는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다. 해외엔 덜 소개된 한강의 첫 장편 <검은 사슴>(1998)때부터 확인되는 바다. “나는 어두운 골짜기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는, 그 ‘어둠’의 삶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쳤던 여성이 주인공이다. 지극히 개인적 면모를 들춰 인간 생래의 고통을 좇는 이 소설의 배경이 어디이던가. “농촌에서 쫓겨나고 도시빈민지역에서도 밀려난 사람들이 마지막 선택으로 남겨두웠던 도시” “사고로 죽고, 사고로 안 죽으면 진폐로 죽고” 그렇게 “죽을 만큼 부려먹다가 필요 없게 되었으니 아무런 대책 없이 쫓아내버”려진 이들의 터, 강원도 가상의 한 폐광촌이다. 1970년대 산업 역군에서 80년대 청산 대상이 되어버린 ‘탄광 막장’이 바로 주인공의 새까만 내면의 고향인 것이다. 한국 역사는 당시 저항에 나섰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군사정부에 의해 고문, 조작 수사되어 옥살이까지 해야 했다고 적고 있다. 그처럼 한국 현대사를 할퀸 공동체의 상처를 ‘증언’하는 한국의 작가들은 한강 말고도 많다. 한강의 노벨상은 그런 한국 작품이 더 많이 호명될 필요성을 말한다. 냉전의 마지막 전장, 유일의 분단국, 유엔의 원조를 받던 최빈국에서 21세기 도약한 선진국이라는 작은 반도에서 불행히도 ‘비극’과 ‘참사’는 끊이지 않았고, 그 앞에서 ‘무엇이 인간이게 하는가’ 묻는 문학 또한 계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발 없는 새>

소설가 정찬(71)의 단편 ‘슬픔의 노래’는 한국어로 쓰인 가장 밀도 높은 아우슈비츠 비극 서사일 것이다. 그가 난징학살, 문화대혁명과 홍위병, 일본군위안부와 결부되어 고통받고, 고통을 주면서 거듭 고통받은 아시아인들을 한데의 인연으로 직조했다. 유명 홍콩 배우 장국영의 자살로 소설은 시작한다. “발 없는 새”는 배우 장국영이 제 삶을 읊조리듯 영화 <아비정전>에서 외던 대사다. 발이 없는 새는 지상에 머물 수 없다. 허무와 슬픔, 늘 부유하는 비극적 운명의 시현인 것이다. 그러나 정찬은 그 운명적 삶을 견뎌 보듬어가는 ‘발 없는 새’들을 실로 아름답게 그려낸다.

<아버지의 땅>

작가 임철우(70)의 소설집(1984). 그중 단편 ‘사평역’은 겨울밤 전라도 시골 간이역에서 연착 중인 열차를 기다리는 장삼이사들 얘기다. 학생운동으로 갓 제적된 대학생, 돈 벌고자 중졸에 상경해 술집서 일하는 여성, 늙고 병든 농부 등. 광주항쟁의 상흔, 희망을 잃은 촌락, 단 한 번 발화되지 못할 무지렁이들의 비애적 삶이 역사(驛舍) 밖 퍼붓는 눈 따라 모처럼 이야기로 쏟아져 나오지만, 이내 그 눈에 파묻히고 말 듯하다. 작가 한강이 15살에 읽고 특정 인물 대신 “인간의 삶 자체가 주인공이 되어서 내적인 리듬을 가지고 끝까지 흘러가는 게 무척 놀”라웠다며 “나름의 방식을 가진 소설을 언젠가 쓰고 싶다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 작품이다.

<눈먼 자들의 국가>

<한겨레>에서 2024년 상반기 한국 시인들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21세기 가장 반시적(反詩的)인 사건’으로 최다 언급된 것이 ‘세월호 참사’다. 시에서도 불가능한 비극이란 말일 것이다. 2014년 4월 여객선 한 척 가라앉고, 300명 넘게 수장됐다. 책은 희생자를 추모하면서도 비극을 망각하지 않도록, 문인이 중심 되어 글을 엮은 산문집이다. 소설가 김애란·김연수·박민규·황정은, 시인 김행숙·진은영 등이 썼다. “얼마나 쉬운지 모르겠다.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여 웅크린 언어로, 사력을 다하여 쓴다, ‘절망 금지’를.

<제주도우다>

한강이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2021)를 쓰며 참고한 자료 가운데 작가 현기영(83)의 장편 <지상에 숟가락 하나>(1999)가 있다. 강제된 금기였던 제주 4·3의 비극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전면화한 소설 <순이 삼촌>(1978)의 저자로 이후 ‘4·3 제주’의 문학적 구원에 헌신해온 이가 현기영(83)이고, 그 긴 여정의 대단원이 4년 걸쳐 완성한 3권짜리 소설 <제주도우다>이다. 노인 안창세가 10대 중반 겪은 학살의 참극을 그의 손녀 부부가 다큐멘터리로 만들고자 한다. “누나와 외삼촌을 한꺼번에 잃었고 그 자신도 죽음의 문턱 바로 앞까지 끌려갔었다”던 안창세는 그러나 더 말하기를 마다한다. 당시를 기억하길 거부하는 것이다. 왜일까. 소설에서 간구한 이어 말하고 이어 듣기가 또한 <작별하지 않는다>이다.

<파문>

1970~80년대 한국은 국가 주도형 산업화의 시기였다. 군부독재 정권 때였다. 사상 탄압, 인권 유린, 노동 착취가 만연했다. 노동권을 주장하는 노동자가 ‘반공 국시’를 흔드는 ‘빨갱이’로 내몰리곤 했다. 그 노동자의 투쟁과 삶을 다룬 소설가의 작품이 없지 않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가 직접 쓴 소설은 극히 드물다. 1980년대 노조 탄압하는 군사정부에 맞서 역대 가장 긴 저항과 가장 많은 해고자를 기록한 원풍모방(섬유직물 제조업체)의 10대 여공 출신 장남수가 글쓰기를 배워가며 쓴 소설이 그중 올돌하다. “소설이 아니면 쓸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 와글와글 치밀면서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그럼에도 끝내 풀어낸 이야기가 7편 단편으로 재구성됐다. 이건 ‘기록’의 완결이 아니다. 늙은 어머니가 중년 된 딸에게 지난날 학교 대신 공장 보냈다 사과하니, 화해하고 치유하는 여정의 비로소 시작이다. 소외된 자들이 사력을 다해 자신을 존재증명할 때, 내일 소외될 자들의 존재도 건사된다.

임인택 집필

<한겨레>에서 문학을 담당하고 있다. 2003년 입사해 탐사기획팀장, 스페셜콘텐츠부장 등을 지냈다. 한국기자상을 네 차례 받았다. 관훈언론상을 받았다. <4천원 인생> <아동학대에 관한 뒤늦은 기록> 등을 공저했다. 〈매그넘 코리아(MAGNUM KOREA)-매그넘이 본 한국〉 사진집 캡션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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